[헤르만 헤세, 시인의 그림 ①] 정신치료 시작과 함께 붓을 잡은 이유

다아트 이상면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기자 2022.04.21 16:18:51

이 연재는 한국에서 애독되는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그림들을 따라간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헤세의 그림에는 때로 그의 말과 시가 더해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 시인의 그림’이란 제목이 가능하다.

험난한 20세기를 고뇌와 함께 살았던 헤세지만 그의 수채화과 드로잉들에는 소박한 사랑과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하다. 시대의 고통을 펜으로, 그리고 또한 붓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헤세의 ‘시 같은 그림’에서 21세기 독자들이 힐링을 얻을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필자는 독일 문학과 예술 이론을 전공했으며 자신이 화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독일과 스위스의 헤세 기념관들, 헤세가 살았던 집 등을 돌아보면서 느낀 감상과 지식은, 헤세의 미술을 따라가는 데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문화경제 = 이상면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헤세의 그림

헤세는 성장소설로 유명한 <데미안>과 더불어 그의 낭만적인 서정시들이 널리 읽힌다. 그가 그린 그림들도 사랑받고 있다. 어린이들의 그림처럼 단순하면서도, 따스하고 산뜻한 색감을 품고 있는 그의 수채화들은 보는 사람을 순진한 동화 속으로 이끌며 꿈꾸는 듯한 환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인인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세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헤세는 바젤에 거주하던 1917년 무렵, 즉 40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919년에는 스위스 남부 테신(Tessin/Tiziano) 州의 소도시 몬타뇰라(Montanola)로 이사해 계속 이 지역에서 살면서 1920~30년대에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몬타뇰라를 중심으로 알프스 산과 호수가 있는 테신의 멋진 풍광을 그린 ‘테신의 풍경’이 헤세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 후 헤세는 60세가 넘은 1940~50년대에도 계속 그렸으니, 평생 그림 작업을 지속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헤세는 일찍이 문학과 그림을 병행했는데, 미술 작업 초기인 1920년에는 그림이 곁들여진 시화집 <화가의 시>(Gedichte des Malers)를 출간했고, 수채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헤세는 그때부터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세 번째 부인이자 죽을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동거동락했던 니논(Ninon)은 미술사학자였으니, 미술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테신에서 그림을 그리는 헤세(1920년대).

헤세 기념관을 찾아가 그림들을 보면, 헤세는 가족과 지인에게 보내는 엽서나 편지 글에 그림을 곁들이거나, 작은 종이에 펜으로 시를 쓰고 그 옆이나 아래-위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문자(시)와 그림을 나란히 놓은 것은 한자 문화권의 시서화(詩書畵) 전통과도 유사하다. 그의 문학 작품과 그림이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우연이 아닌 듯 하다.

헤세는 일생 동안 30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대부분 펜과 연필로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들이며, 엽서 한두 장 크기이다. 단독 그림 작품들도 대개 A4 종이 혹은 그보다 약간 큰(약 20~25 x 30~40cm) 정도의 소품들이다. 그림들은 개인 소장가와 독일 화랑들, 그리고 그의 기념관 3곳에 산재해 있다. 헤세 기념관은 칼브와 가이엔호펜, 몬타뇰라에 각각 있다.

오늘날 돌아볼 때, 헤세의 그림들은 전문 화가의 작품 수준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인생의 난관들을 극복하는 ‘정신적 치유를 위한 시인의 그림’이고, 또 문자(시)와 그림이 어우러진다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연재에서는 이런 관점 하에서 그의 그림들을 생애, 문학 작품과 함께 해설한다.
 

<테신 풍경>(1928)

청년 시기 그림 – 바젤 시절의 ‘치유를 위한 미술’(art for healing)

양부모 모두 기독교(개신교) 목사-선교사이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헤세는 부모의 희망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다. 12세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14세 때 고향 도시 칼브에서 약간 떨어진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헤세는 신학교의 엄격하고 획일적인 교육, 그리고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으며, 자살 소동도 있었다. 정신요양을 받은 후 그는 15세 때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퇴교하고 나와, 부친의 기독교 서적 출판을 도왔고, 18세(1895년) 때 인근 도시 튀빙겐의 서점 직원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청년 헤세는 비로소 정신적 안정을 찾고 서점 일과 더불어 시와 산문을 쓰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헤세는 실로 힘든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당시의 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 교육은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과 더불어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의 헤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의 서유럽 여러 나라들의 기숙학교 생활과 교육은 독일과 비슷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917 <산맥>(‘Im Gebirge’, 종이에 수채) 

20대 중반이 된 헤세는 <페터 카멘진트>(‘향수’, 1904), <수레바퀴 아래서>(1905) 등을 출간하며 주목받는 청년 작가로 인기를 얻어갔다. 1904년 27세의 헤세는 9년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놀리와 결혼하고, 1907년에 독일 남쪽 스위스-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의 작은 마을 가이엔호펜의 농가로 이사했다. 1911년에는 화가 한스 슈투르젠에거(Hans Sturzenegger)와 함께 아시아 여행을 가서 인도와 실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수마트라) 등지를 돌아다니고 왔다. 귀국 후 1912년에는 스위스 베른의 화가 친구 알베르트 벨티의 주택으로 이사했다.

작품 출판을 계속하며 젊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어가던 그때 헤세에게는 시련이 닥쳐왔다. 제1차세계대전(1914~18년)이 발발하자 헤세는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신문, 잡지에 기고했는데, 애국적 민족주의적인 독일인들로부터 “조국 배신자, 전쟁 기피자” 등의 비난을 받았다(실제로 헤세는 전쟁 참여를 위해 수도 베를린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부적격으로 판정받아 참전할 수 없었다. 1914년에 헤세 나이가 37세인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917 <농가>(‘Gehöft’, 종이에 펜 수채)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헤세는 포로가 된 독일 병사들에게 문고판 책을 출판해 위문 도서로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셋째 아들 마르틴이 뇌막염으로 입원하여 병 간호를 해야 했고, 아내 마리아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발생했고, 1916년에는 부친이 작고했다. 결국 마리아는 1919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헤세는 1923년 이혼했다. 또한, 세간의 비판으로 인해 헤세는 독일에서 작품 출판이 어려워졌다. 견디기 어려운 인생의 난관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1910년대 중후반에 헤세는 정신적 고통을 심하게 겪으며 노이로제에 걸려 자주 루체른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았다.

 

1918 <정원 풍경>(‘Gartenansicht’, 종이에 펜 수채)

헤세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심리치료를 받던 이때였다. 헤세는 1916년 5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루체른의 정신병원에서 당대의 저명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의 제자 J. B. 랑 박사로부터 심리치료를 받으며, 그의 권유에 따라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이때 헤세는 1916년 12월부터 크레용이나 펜으로 자신의 무력감과 불안을 표현하는 간단한 드로잉으로 ‘꿈의 형상들’을 그렸다.(김선형, ‘화가 헤세와 그의 그림세계’, 『헤세 연구』, 제31집(2014), 29쪽) 랑 박사의 치료법은 환자가 꿈의 내용을 그리면 그것을 분석하면서 내면의 심리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느낀 헤세는 ‘꿈의 형상들’에 대해 이듬해(1917~18년) 일기(‘꿈의 일기’)에 그 의미를 분석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미술 치료 이후 헤세는 그림 그리기에 대단한 흥미와 애착을 느꼈고, 그 후 꿈과 내면뿐 아니라, 바깥세계, 즉 자연을 바라보며 다양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세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엽서에도 글 위아래에 꽃과 나무, 호수와 집 같은 간단한 풍경 등을 그려 넣어 보내곤 했다.

당시 심리치료 후 베른에서 거주하던 마지막 시기(1917~19년)에 그린 자연풍경들을 보자. 중년에 접어드는 40세 헤세의 초기작인 <산맥>(1917)은 산의 설경을 그린 것으로, 베른 근처 알프스 산의 겨울 풍경으로 보인다. 험준한 산봉우리와 가파른 능선을 짙은 회색으로 그렸고, 봉우리의 음영 부분들을 청회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뛰어난 기술은 아닐지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수채화를 이미 수년간 그려본 솜씨로 보인다.

다음 두 작품은 베른의 주택을 펜과 수채로 그렸다. 여기서 헤세는 주택 모습을 펜으로 상세히 묘사한 다음에 수채로 채색하는 방법을 택했다. <농가>(1917)는 헤세가 거주하던 베른 시 멜헨뷜 거리의 집을 그린 것이고, <정원 풍경>(1918)은 같은 거리에 있는 자기 집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헤세는 농가와 도시적 주택을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차분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낭만주의적 세밀화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펜으로 묘사하고 담백한 채색을 하는 방법은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 있었는데, 이 두 그림은 특히 독일의 고전 대가들인 뒤러와 알트도르퍼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헤세는 당시 자신의 화법을 설명하면서 뒤러와 알트도르퍼 같은 대가들처럼 “마음을 세세하게 쓰고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필시 헤세는 고전적인 펜 수채 방법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풍경들을 펜 수채화로 그렸다.

그런데, 당시에 그려진 <자화상>은 사뭇 다르다. 헤세가 42세에 그린 <자화상>은 또 다른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헤세가 그린 ‘자화상’이란 점부터 특이하다. 헤세와 가까이 지내던 화가들이 종종 그를 그려주었기 때문에 ‘헤세 초상화’는 여러 작품이 있지만, 헤세 자신이 그린 자화상은 드물어서 희귀한 작품이다.

<자화상>(1919, 종이에 수채)

헤세의 <자화상>은 일그러지고 불분명한 얼굴 모습을 보여준다. 노란 안경테에 눈동자는 잘 안 보이고, 왼쪽 귀에는 피처럼 빨간색이 있고, 왼쪽 목 부분도 불그스름하다. 마치 고호가 그린 초상화 같고, 당시 독일에서 일어났던 표현주의적 화풍도 일부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습은 이 당시에 헤세가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게 헤세는 자신의 정신적 치유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10대 때는 학업 문제, 20대 청년 시절엔 이혼과 가족들의 병, 전쟁 반대로 인한 독일인들의 비난 등으로 시달리면서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극복하려고 그렸다.

헤세는 1920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 그리는 일은 나의 마술 도구이며 파우스트의 외투이다. 그 도움으로써 나는 벌써 수천 번이나 마술을 부렸고, 어처구니없는 현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적었다(홍순길, ‘화가 헤세’, 『헤르만 헤세』(전시회 도록, 2000.6.2.-7.10. 세종문화회관).

헤세의 그림이 왜 ‘치유의 그림’, 혹은 ‘힐링 아트’(healing art)라 불리는지 이해할 만하다. 우리도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며 각자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다. 헤세의 그림들은 우리에게도 호소하는 바가 있고, 우리도 그의 그림으로 치유받는다면 좋을 것이다. 다음 회엔 1920년대의 헤세 그림들을 만나본다.

 



헤르만 헤세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부르그 주의 소도시 칼브(Calw) 출생. 부모의 권유로 신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서점에서 일하며 시와 산문을 발표하는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주목받는 작가가 됨. 제1차세계대전(1914~18년) 때 전쟁 반대 글을 발표하여 독일 신문-잡지로부터 비난받음. 독일을 떠나 스위스 바젤과 몬타뇰라로 이주하여 시와 소설을 발표하고 그림 활동 시작. 나치 시대(1933~45년)에는 민족주의 예술에 부합되지 않는 작가로 나치에 의해 분류돼 작품 출판이 어려워지자 스위스에서 출판을 이어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집에는 <낭만의 노래>(1899), <위기>(1928), <밤의 위로>(1929), <신시집>(1937) 등이 있고, 소설로는 <데미안>(1919), 불교 사상이 깃든 <싯다르타>(1922), 정신(지성)과 육체(관능)의 갈등을 다루는 <나르시스와 골트문트>(1930), <내면으로의 길>(1931), <동양 여행>(1932), <유리알 유희>(1943) 등이 있다. 젊은이의 방황과 탈선을 다룬 <황야의 늑대>(1927)는 1960년대 미국의 反문화(히피) 운동 시기에 컬트 작품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서독에서 여러 문학상과 더불어 평화공로상(1954)도 받음. 1962년 스위스 몬타뇰라에서 타계하여 그곳 공동묘지에 묻힘.


국내에서는 그의 많은 시와 소설 대부분이 번역되어 널리 읽혔고, 2000년 이후 작품집들과 더불어 수채화와 드로잉을 곁들인 전시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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