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커다란 화면 위 거칠게 튀어나와 있는 흔적들. 화면 위 무언가를 새롭게 붙인 줄 알았는데 이건 칠해진 아크릴 물감의 흔적들이다. 평면이면서도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그림에서 넘쳐흐르는 강한 생명력이, 재불 작가 허경애의 개인전이 열리는 아트웍스파리서울 갤러리에서 넘실거린다.
1977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현재 프랑스의 도시 에브르에 살고 있다. 2011년도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통해 데뷔했고, 이후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전시를 열어 왔다. 이런 작가의 삶이 녹아들어간 것일까? 작가의 화면에선 동서양을 아우르는 조화가 눈길을 끈다. 아마 서양인이 그림을 보면 ‘동양적’이라고 할 것이고, 동양인은 ‘서양적’이라 느낄 것이다.
재료적인 측면에서는 다분히 서양적이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캔버스 위에 작업한다. 그런데 완성된 작업은 다채로운 색감 속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 여백의 미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건 의도했다기보다는 작가의 마음이 가는대로 자연스럽게 따라간 결과다.
작가는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 차원에서 작업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원색을 굉장히 좋아했다. 유치원 시절 원색에 이끌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좋아하는 색을 마음껏 사용한 것인데 화면에서 한국의 단청이 보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15년째 살고 있는 프랑스와 자신이 자란 한국의 영향이 보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화면에 어우러진 건 아닐까.
때로는 고국에 대한 향수로 작업하기도 했다. 초록빛이 가득한 작품은 한국의 대나무 숲을 떠올리며 작업한 것이다. 작가는 “내 작업의 모티브는 자연이다. 바다를 담은 푸른빛, 단풍을 담은 주황빛 등의 화면이 있다. 초록빛 작품의 경우 대나무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한국의 대나무 숲이 그리워 앞마당에 대나무 화분 하나를 심었는데 점점 자라 거의 숲 수준이 됐다. 이 대나무 숲을 보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유럽에서는 대나무를 보기 힘들어 이 작품을 보고 굉장히 동양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각 화면을 대표하는 색마다 작가가 몰두했던 모티브들이 있지만 이것을 작품명 ‘대나무’ ‘바다’ ‘산’ 등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파란색을 보고 파도를 떠올리든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든 그건 온전히 관람자의 순수한 느낌에 맡기고 싶었다. 작품명을 정하면 상상력과 느낌에 제한을 둘 수 있어 정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의 폭을 열어뒀다”고 말했다.
전통적 회화에 대한 작가의 반항심
30~70겹 물감층을 깎아내는 행위로 이어져
동서양의 느낌이 공존하는 화면에서 또 눈길을 끄는 건 회화를 구성한 형식이다. 앞서 언급했듯 평면 위에 작업했지만 완성된 결과는 결코 2차원적 평면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평면과 입체가 공존하는 형태다. 현재의 화면이 되기까지 무수한 과정이 있었다.
작가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서양 회화와 판화를 수학했고, 이후 파리에서 미디어, 퍼포먼스,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접했다. 작가는 “처음엔 그림만 그렸으나 점차 하얀 캔버스에 이미지를 그려 넣는 것에 부담과 지루함을 느꼈다. 그래서 판화도 배우고, 퍼포먼스도 펼치며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모색했다”며 “그 과정에서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림을 ‘쌓는’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작가는 화면 위에 물감 층을 생성한다. 이 과정은 화면 위에 팔레트를 구성하는 것과도 같다. 물감 한 층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그 위에 또 물감을 칠하고 또 칠하기를 수십 번, 그러다보면 평균 30에서 70겹의 물감 층이 생긴다. 이 다음 수술용 칼, 조각 칼 등으로 마른 물감을 긁어내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이어간다. 수술용 칼은 파리에서 공부할 때 교수의 제안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날카롭고 얇아 물감을 긁어내는 데 제격이었다고.
물감은 긁힌 형태로 화면 위에 남는데, 손의 힘에 강약을 조절한 작가의 노동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매우 역동적인 느낌이다. 때로는 힘을 너무 줘서 캔버스가 찢어지기도 하고, 칼에 손을 베이기도 다반사였단다. 그만큼 온힘을 쏟아 물감을 긁는다.
작가는 “내 회화는 ‘자르기’ ‘긁기’ ‘접기’로 완성된다. 캔버스를 자르고, 물감을 긁고, 때로는 접으며 화면을 완성시켜나간다”며 “이건 기존 캔버스에 대한 나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과거 작업들을 돌이켜보니 톱밥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캔버스를 실 모양으로 계속 잘라 나온 실타래 모양을 설치하는 등 전통적인 회화에 머무르는 걸 원하지 않는 흔적들이 발견되더라”고 말했다.
작가의 이런 성향에 판화를 공부했던 경험까지 어우러져 결국 지금의 ‘긁어서 완성되는 회화’가 만들어진 셈이다. 물감을 하도 긁다보니 작업실에는 늘상 물감 가루가 날리기 마련이다. 이 가루를 긁어낸 화면에 일부 뿌리는 것으로 작가의 화면은 완성된다. 작가는 “물감 가루가 많이 쌓이는 걸 보고 점점 욕심을 내서 긁을 때도 있다. 마치 내 고심을 긁어내는 듯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며 “물감 가루 파편 하나조차 나의 작업”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임채진 아트웍스파리서울 갤러리 대표는 “작가는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의 전통적인 회화에 머무르는 것 대신에 매체의 한계를 넓히고, 물감을 해체하는 행위 등으로 창작적 자유를 만끽한다”며 “몇 십 겹의 마른 물감을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 전통적 회화를 넘어서는 오브제 회화의 새로운 차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렸다’는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그림을 잘랐고, 깎았고, 접었으며, 뿌리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가 허경애의 화면을 구성했다. 전시는 아트웍스파리서울 갤러리에서 7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