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아트 김금영 기자 2024.12.24 10:31:11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공간에 침묵이 찾아오자 이내 들리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 소리. 끊어질 듯하다 다시금 이어지는 그 소리는 마치 공간에 자리한 작품들이 살아 숨 쉬며 내는 심장 박동 같기도 하다. 그만큼 강렬한 느낌이 전시장을 휘감고 있었다.
가나아트가 전광영 작가의 개인전 ‘집합: 공명과 그 사이(Aggregations: Resonance, In-between)’를 연다. 작가는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래 2003년 미국 스위스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섹션에 초청되고, 2022년과 2018년에 각각 모스크바현대미술관과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여는 등 국제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해온 작가가 6년 만에 갖는 국내 개인전이자, 1980년대 초기작부터 2024년 최신작까지, 작가의 작업세계를 총망라하는 자리다.
작가는 “그간 주로 전시를 해외 미술관에서 열었다. 국내에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많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내 전시를 감명 깊게 봤다며 소감을 전하다가 서울에서 ‘리틀 베니스’식 전시를 선보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며 “이런 기회가 매우 감사하고 벅찼다. 60여 년 동안 작업을 이어왔는데 오래 작업한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시는 ‘올해의 작가 2001-전광영’과 2022년 제 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ed)’의 출품작도 함께 다루며 작가의 작품 세계 면면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 가로 11m, 세로 4m 벽에 펼쳐진 영상작업도 한국에 첫선을 보인다.
특히 작가는 작품을 그냥 설치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공간에 어떻게 놓이고, 이를 통해 전체가 어우러져서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이에 대표작들을 순서대로 늘어놓기보다는 연관성이 있는 작품들이 서로 공명하도록 설치했다.
고서와 한국 보자기 문화가 ‘집합’했을 때
전시가 시작되는 1층 첫 전시장엔 ‘치유’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치유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내내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마치 오랜 가뭄으로 갈라진 땅과 같은 선들이 작품에 두드러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발견한 파란 물줄기, 즉 작을지라도 분명 존재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점이 눈에 띈다.
작가는 “스스로 ‘나는 어떤 작가냐’고 물을 때 눈으로 보이는 걸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속의 메시지를 그리는 작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은 외형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반면 정신은 매우 힘들고, 병들어가고 있다. 진정한 치유가 필요한 시대”라며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때도 이런 정신적 치유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짚었다.
메시지뿐 아니라 독창적인 표현 방식 또한 작가가 60여 년의 작업 생활동안 꾸준히 연구, 현재도 천착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2층 첫 전시장엔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작업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작가는 대표작 ‘집합’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전 자신의 작업 방향을 찾아나가던 초기작들도 설치됐다. 작가가 197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한 때 추상표현주의에 심취해 있을 때 작업했던 결과물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초기작들에 대해 “본래 가족들에게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라도 세상에 내놓지 말라 했던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새로운 걸 보겠다는 마음에 미국으로 떠났다. 현지 미술관들을 돌아다녔는데 특히 추상미술을 많이 보고 들으며 접했다. 한국에서 혼자 작업할 땐 내가 잘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외에 가서 새로운 것들을 접하니 왠지 모를 위축감이 들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때 내가 뭘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는데, 위축감 속 해외 추상미술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줄을 긋는 방식으로 시작해서 점차 화면 속에서 줄이 깨지기 시작했는데, 어찌 보면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단색화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며 “다만 내게 맞는 옷이 아니라 소화를 잘 하지 못했다. 그 시절 그린 작품들을 지금 보면 많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현재의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 과정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고자 이 작품들을 전시장에 꺼내놓았다는 설명이다. 작가는 “방황의 시절을 거치면서 ‘내 진정한 경쟁력은 한국 고유의 정신과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며 “한국 곳곳의 미술관, 박물관, 민속촌 등을 다니며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가의 대표작 집합이 탄생했다. 집합에선 크게 두 가지의 요소가 눈에 띈다. 바로 ‘고서(古書)’와 ‘보자기’ 형식. 집합은 수천 개의 스티로폼을 논어, 맹자, 법전이나 소설 등 고서의 내용이 담긴 한지로 감싼 뒤 종이를 꼬아 만든 끈으로 묶고, 화판에 촘촘하게 매달아 완성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내게 맞는 옷을 찾자고 결심한 뒤 한국 고유 정신의 뿌리를 찾아다녔는데, 이때 불현 듯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한약방 풍경이 떠올랐다”며 “고서와 보자기 소재 모두 한국의 정(情)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자와 한글이 빼곡하게 쓰인 고서는 예부터 지식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던 옛 문헌의 한 귀퉁이들”이라며 “이 고서들이 모여 삼각형으로 싸는 보자기의 형태를 띠도록 했다. 서양은 직육면체를 정확하게 재서 차곡차곡 쌓는 ‘박스 문화’가 통상으로, 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요시한다. 반면 과거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싸주던 보자기는 계량이 어렵고, 모양이 망가질지라도 하나라도 그 안에 더 담아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게 바로 한국의 정, 영혼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삼각형 조각의 만남은 조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삼각형 조각을 싸고 있는 한지엔 서로 다른 고서의 내용이 적혔는데, 이 요소들은 작가의 손에서 우연히 만나고 얽힌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지식, 역사, 사상 등에 기반을 둔 이야기들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접하면서 조화를 이루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간다.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갈등을 위한 충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정신적으로 멋있는 작품으로 치유 이야기”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올해의 작가 2001-전광영’과 제 59회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인 ‘재창조된 시간들’에 출품됐던 작품들 총 4점이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선보인 대형 설치 작업 ‘집합001-MY057’은 작가의 첫 입체 작업으로, 높이 3m, 지름 1.1m의 원기둥 12개로 구성됐다. 이 작품은 제 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5개의 원기둥으로 재구성돼 전시됐으며, 이번 전시엔 6개의 원기둥으로 이뤄진 작품을 선보인다.
먼저 바닥에서 솟아오른 듯한 형상의 설치 작업 ‘집합19-MA023’은 영상 작업 ‘존재의 영원성(Eternity of Existence)’와 함께 배치됐다. 가로 폭 11m, 세로 폭 4m의 거대한 벽을 가득 채운 나이아가라 폭포의 낙수는 관람자를 압도하지만, 전시장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두려움과 의아함을 증폭시킨다. 작가는 태초의 생명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집합19-MA023’ 작품과 이 영상 작업을 마주보도록 배치시키며 수만 년의 시간을 품은 자연과 인간이 대면한 상황을 연출한다.
전시장 보다 안쪽엔 병든 심장 모양의 대형 작업 ‘집합15-JL038’이 설치됐는데, 이 또한 ‘재창조된 시간들’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죽어가는 사람의 심장 소리와 함께 공간에 배치했다. 작가는 “임종 직전의 실제 심장소리와 그 공간에 함께 설치된 검은 심장 덩어리처럼 보이는 조형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이는 마음이 병든 현 시대의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코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전시 공간 한켠 검은 심장 덩어리와 대조되는,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빨간 심장을 상징하는 듯한 작품도 함께 설치됐다. 작가는 “나는 작품으로 항상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지만,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떻게 치유를 할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 항상 고민한다”고 강조했다.
이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작업을 통해 ‘치유’를 많이 이야기했다. 치유가 끝나고 나면 ‘품’과 관련된 작업을 생각 중이다. 어머니 품, 다정한 품 등 앞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다”고 말했다.
작가는 “아내와 가끔 과거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때 페인팅 작업을 했으면 형편이 지금보다는 좋았을텐데’ 하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지속적으로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고, 정신적 치유 메시지를 던지는 작업에 대한 고집을 끌고 오길 잘했다’고 한다. 그 과정이 고달팠지만 보람을 느낀다”며 “예술은 정신적이면서도 독창적이어야 한다. 이를 잊지 않고 동공으로 봤을 때 멋있는 작품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멋있는 작품에 계속 정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 2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