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아트 김금영 기자 2025.04.28 19:25:48
GS아트센터 개관작이 베일을 벗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가 13년 만에 내한해 무대를 채운다.
22일 GS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ABT의 수전 재피 예술감독을 비롯해 무대에 서는 무용수들이 참석해 소감을 밝혔다. 재피 감독은 18세의 나이에 ABT에 입단, 22년 동안 수석 무용수로 활동한 뒤 2022년 12월부터 예술감독으로 ABT를 이끌어 왔다.
특히 2022년 재피 감독은 1996년 ABT의 첫 내한공연 이후 3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무용수로서 1996년에 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이번엔 대대적 공사를 거친 뒤 문을 여는 GS아트센터의 개관 행사에 초대돼 기쁘다”고 감회를 전했다.
미국 국립발레단 ABT는 러시아 마린스키·볼쇼이 발레단, 영국 로열 발레,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발레단이다. GS아트센터의 개관과 ABT 창단 85주년을 기념해 추진된 이번 공연을 위해 수석 무용수 16명을 포함해 총 104명(무용수 70명 포함)이 대거 내한한다.
ABT는 클래식부터 컨템포러리 발레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레퍼토리로 유명하다. 각 시대별 혁신적인 안무가들의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적극 담아내며 현대의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왔다. 특히 조지 발란신, 앤터니 튜더, 제롬 로빈스, 트와일라 타프,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크리스토퍼 휠든, 웨인 맥그리거 등 동시대 안무가들의 ABT 초연작들은 20세기와 21세기 무용계의 역사이자 흐름이 돼왔다.
이번 무대에서도 이 흐름을 이어간다. 재피 감독은 “고전, 현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 보여줄 때 작품들 간 보이는 긴장감이 신선한 효과를 준다. 이번에 ABT가 보유한 다양한 레퍼토리와 함께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량을 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며 “또한 장편뿐 아니라 짧은 작품들을 묶은 구성 및 앞으로의 고전이 될 만한 혁신적인 신작들도 포함해 선보인다”고 말했다.
클래식부터 컨템포러리까지 아우르는 프로그램
가장 먼저 1947년 ABT가 세계 초연한 조지 발란신의 ‘주제와 변주(Theme and Variatons)’로 포문을 연다. 차이콥스키의 선율과 함께 러시아 황실발레로 표상되는 발레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ABT가 가장 최근 초연한 신작 ‘변덕스러운 아들(Mercurial Son)’(2024)은 현재 컨템포러리 무용계에서 주목받는 안무가 카일 에이브러햄의 작품이다. 전자 음악 리듬을 배경으로 고전 발레의 정확성과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하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조화를 이룬다. 재피 감독은 “각각의 무용수들이 지닌, 틀에 가둘 수 없는 혁신적인 본능과 에너지를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와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협업작 ‘다락방에서(In the Upper Room)’(1986)도 볼 수 있다. 재피 감독은 “1980년대에 소개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흡입력을 지닌, ABT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소개했다.
ABT 무용수 출신의 떠오르는 안무가 제마 본드의 신작 ‘라 부티크(La Boutique)’(2024)도 이어진다. 지난해 세계 초연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국 안무가 프레데릭 애쉬톤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고전발레와 컨템포러리 감각이 세련되게 어우러진 무대를 펼친다. 재피 감독은 “보기엔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무용수들의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 2인무 시리즈로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대질주 코트살크’, ‘실비아’, ‘시나트라 모음곡’, ‘네오’ 중 파드되(여성과 남성 무용수가 함께 추는 쌍무)를 선보인다.
해당 공연들은 24~27일 무대를 채우는데 반복되는 레퍼토리도 있다. 관련해 재피 감독은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다른 캐스트의 공연을 보기 위해 반복적으로 공연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며 “더 넓은 범주에서 두 세 번씩 공연을 보며 깊은 인사이트를 얻어가기를 바라는 의도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저벨라 보일스톤·서희 등 스타 무용수도 공연
‘발레계의 할리우드’라는 별칭을 지닌 ABT는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을 겸비한 무용수들 또한 유명한데, 이 무용수들이 이번 무대에 오른다.
대표적으로 이저벨라 보일스톤이 있다. 2005년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 합류해 2006년 ABT 메인 컴퍼니 수습 단원, 2007년 코르드발레를 거쳐 2014년 8월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와 해외 무대에서 ABT의 모든 주요 역할을 맡았으며, 파리 오페라 발레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 게스트 아티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2023년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따뜻함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걸 느꼈다”며 “남편도 한국인인데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가족들에게도 공연을 선보일 수 있어 기대된다”고 말했다.
무용수뿐 아니라 힙합 뮤지션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제임스 화이트사이드도 있다. 2002년 보스턴 발레단에 입단해 활동, 2012년 9월 ABT에 솔리스트로 입단한 그는 2013년 10월 수석 무용수에 임명됐다. 그는 “ABT 안팎에서 하는 모든 활동들은 창의적 욕구를 위한 것이다. 춤뿐 아니라 직접 퍼포밍, 노래, 편집도 하고 책도 쓰며 팟캐스트도 하고 있다. 이 다양한 작업들을 이어오는 20년 동안 다행히 ABT는 한 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관련해 베리 휴슨 경영감독은 “제임스를 오래 알고 지냈다. 그가 보스턴 발레단에 있었을 때 내가 경영감독을 맡고 있었다”며 “발레 무용수는 긴 시간 발레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 욕망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ABT 안팎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창조적인 활동을 ABT는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기 밝게 비추는 게 예술의 사명”
ABT의 이런 다양성 추구는 무용수의 개인적 활동을 포함해 인종과 젠더도 넘나든다. ABT는 발레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 유색인 창작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목소리와 시선을 앞장서서 반영해 왔다. 메이저 발레단으로는 드물게 흑인 여성 수석 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를 임명했고, 지난해 여성 안무가 헬렌 피켓의 전막 발레 ‘죄와 벌’ 초연으로 발레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혁신의 흐름은 현재의 재피 감독으로 이어졌다. 재피 감독은 2022년 ABT 역사상 첫 여성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재피 감독은 “오랜 시간 예술세계 안에서 리더 자리엔 주로 백인 남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가운데 ABT는 여성 안무가, 아티스트, 유색인종 레퍼토리 확장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작품을 만들고 있다”며 “그렇다 해서 백인 남성을 무조건 배제한다는 게 아니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그것이 ABT의 방향성”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이번 공연에 선보이는 ‘라 부티크’에서는 미래의 창작가, 특히 여성 안무가의 지원으로 지속가능한 무용계를 만들어 온 ABT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창단부터 다양성 실천을 목표로 둔 ABT엔 한국인 무용수들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한국인 단원 5명의 활약도 볼 수 있다. 특히 ABT의 첫 한국인 수석 무용수로, 올해 20주년을 맞은 서희도 무대에 오른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 20년이 흘렀다. 20년 동안 장인처럼 한눈팔지 않고 한길을 오래 걸어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존감이 크다”며 “발레단 입단 이후 후배들이 많이 들어와 기쁘다. 처음엔 나를 선생님이라고들 불렀는데, 타향살이를 함께 버티면서 지금은 누나, 언니가 돼 서로 도울 수 있는 동료가 됐다. 이 후배들 또한 이후 또 다른 후배들이 들어오면 서로 도와가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피 감독은 “올해 뉴욕에서 서희의 20주년을 기리는 축하의 자리를 가질 예정이다. 오랜 시간 ABT와 함께 해오며 관객의 가슴을 울려온 예술가”라며 “서희 외 여타 젊은 한국인 무용수도 ABT에 소속돼 있다. 각각의 개성은 다르지만, 세계에서 뛰어난 역량을 지닌 무용수로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뛰어나다. 특히 무모할 만큼 진취적으로 열심히 하는 태도는 공통점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한국인 무용수가 ABT에서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휴슨 경영감독 또한 “현재 ABT엔 19개 국가에서 온 무용수들이 활동 중인데 한국 무용수들도 활약 중”이라며 “이번 GS아트센터 첫 공연을 통해 한국과의 인연이 꾸준히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ABT가 추구하는 이념 또한 밝혔다. 휴슨 경영감독은 “현재 미국 사회는 이념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정부는 누가 수장을 맡느냐에 따라 그 흐름이 매우 달라지지만, 예술은 이 가운데 사람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한다”며 “예술은 정치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이념 갈등의 어려운 시기를 밝게 비추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ABT뿐 아니라 모든 예술기관의 사명이라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GS그룹(회장 허태수)의 지원으로 GS문화재단은 강남구 역삼동 GS타워에 위치한 공연장을 리모델링해 24일 GS아트센터를 개관한다.
ABT의 개관 공연은 24일부터 27일까지 총 5회 공연된다. GS아트센터는 “‘경계 없는 예술-경계 없는 관객’을 모토로, 여러 장르를 연결한 다층적, 입체적 예술 경험 제공을 통해 ‘경계 없는 관객’의 요람이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