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아트 안용호 기자 2025.04.14 17:17:52
국제갤러리는 오는 4월 25일부터 7월 20일까지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을 개최한다.
영상, 사진, 조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정연두는 그동안 이질적인 대상들을 횡단하고 접합하며, 시대의 틈을 드러내고 새로운 감각의 짜임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국제갤러리에서 2008년 이후 처음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리듬을 교차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는 유머와 염원의 태도를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의 전시장은 블루스 음악의 각 파트를 연주하는 다섯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이들은 각각의 사연을 품은 느슨한 합주를 이어간다. 연주자들은 다채로운 색상의 다각형 구조체로 구획된 공간의 곳곳에 자리하며 마주 보고 있는 영상, 사진, 조각에 상호 응답한다. 시각 이미지와 음악, 목소리, 억양, 소음 등 청각적 요소의 병치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가시화되지 않지만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삶의 역동과 생기를 음악, 특히 블루스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19세기 중엽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힘겨운 현실을 특유의 리듬과 가사로 풀어낸 이 장르에서 그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과 피치 못할 난관을 통과하는 자조적이면서도 유쾌한 상상의 방식을 발견한다.
음악의 울림을 통해 표현되는 삶의 태도에 공감하며, 작가는 작곡가 레이 설(Ray Soul)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블루스의 12마디 구조와 악기 편성을 차용한 〈피치 못할 블루스〉(2025)를 만든다. 그는 다른 장소, 다른 배경의 연주자들에게 별도의 작곡 없이 67 BPM의 느린 속도와 코드만을 제공하여 거듭된 연주를 요청한 뒤, 개별 곡조의 가닥을 자르고 쌓아 이를 하나의 협연으로 조율한다. 그리하여 생을 살아내는 개개인의 리드미컬한 몸짓은 전시장에서 콘트라베이스, 보컬, 색소폰, 오르간, 드럼 소리로 변환되어 한 편의 비동시적인 협주로 공명한다.
각 연주자들이 주변과 리듬을 이어받으며 나누는 다섯 개의 개별적인 대화로 구성된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손가락에 맞추어 빛을 발하는 항아리를 만나볼 수 있다. 유희적인 블루스 음악이 그 내면에 난처한 사연들을 품고 있고,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현과 마찰하는 손가락 끝의 아릿한 감각을 거쳐 생겨나는 것처럼, 만화경 효과를 통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는 항아리인 〈아픈 손가락〉(2025)은 음악의 이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한편 푸근한 목소리의 보컬리스트는 러시아어로 적힌 자신의 사연을 들고 있는 고려인들의 몸짓에 응답하며 이들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이주민들의 탈구된 시공간 경험에 오랜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이 겪어온 삶의 단편을 들려준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살아온 고려인 후세대들의 인터뷰는 가사가 되어 블루스 멜로디 속에서 반복적으로 불린다. 이들의 사연은 인도네시아에서 유래하는 바틱(batik) 천 위에 새겨져 뒤편 벽에 걸리는데, 녹인 벌꿀집으로 기록된 이야기는 치자, 강황, 자초 등 약초로도 쓰이는 국내 천연 염색제를 통해 천 위에 물들여진다.
블루스 음악과 더불어 전시장에는 다채로운 발효의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몇 해 전부터 막걸리를 손수 담아 온 작가는 쌀이 누룩의 균과 만나 이루어지는 발효의 섭리가 요리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 신비한 세계의 리듬을 블루스 음악과 연결시켰다. 막걸리 기포가 터지는 박자에 맞춰 드럼이 연주되고, 사워도우가 되기 위해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반죽은 연주자의 숨처럼 색소폰 소리와 함께 흐른다. 나란히 전시되는 〈바실러스 초상〉(2025)은 메주를 만들 때 콩이 이국적인 바실러스 균과 만나 발효되어 피어오른 하얀 거품에서 도깨비 같이 삐뚤삐뚤한 얼굴들을 포착한 사진 연작이다. 이렇듯 작가는 발효의 흔적에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며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를 친근하고 익살스럽게 전환시킨다.
미생물의 신비로운 작용은 또한 우주의 창조로도 확장된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연주되는 동안 퍼커셔니스트는 음악에 맞춰 밀가루를 흩뿌리며 우주를 연상시키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 창조의 몸짓 곁에는 은하와 성운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옆에 자리한 영상이 설명하듯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밀가루를 검은 대리석 위에 털어내어 만든 이미지이다.
소망하고 축하하듯 두 손을 비비고 박수를 치며 광활한 우주를 만들었건만 이를 이룬 물질은 알고 보면 밀가루라는, 가벼움과 무거움, 장난기와 엄숙함을 뒤섞는 작가 특유의 역설적 화법은 전시 전체를 밀고 당기며 균형을 이룬다. 이처럼 정연두는 세계의 불가해한 작동 앞에서 익숙한 범주들을 벗어나 지나치게 큰 세계와 지나치게 작은 세계를 병치하고 유머와 염원을 뒤섞으며 삶의 신비를 향한 애정을 잊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연과 운명, 불가항력적인 삶의 희비극을 살아내는 마음의 리듬은 전시라는 무대 위, 서로 응답하는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한 편의 다성적 하모니로 펼쳐진다.
작가 소개
정연두(b.1969)는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작가는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미디어 작업에 주력해 왔다. 주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협업하는 관계적 방법론을 수행하면서 예술과 삶, 예술의 주체와 객체 사이를 넘나드는 문지방을 만든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